The Korea Herald

피터빈트

임원이 나르샤 직원은 따르샤

By 석지현

Published : Oct. 27, 2015 -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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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오후 서울 신논현역 사거리 교보강남타워 앞 길가엔 줄줄이 선 관광버스들이 회사원들을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직장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차례대로 버스에 올라탔다.

우르르 몰려든 그들 사이에선 “설마 내일도 차출되진 않겠지?” “오늘 몇 시에 오려나?” “어쩌겠어, 회사인데...” “우리 가는데 3시간 반이지?” “ 등의 목소리가 오고 갔다.

이는 당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리는 2015프로야구 KBO 한국시리즈 경기에 ‘높은 분’의 참석에도 직원들의 참여가 저조하자 머리수를 체우려 강제 차출된 한 대기업 직원들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Yonhap) (Yonhap)

#군대

이제는 많이 변화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대기업의 문화는 군대와 비슷하다. 업무가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해도 ‘무조건 몇 시까지 끝내’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정시에 퇴근할 때면 ‘요즘 사람들 직장 생활하기 편해’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기 일쑤다.

아직도 한국사회의 직장에선 ‘까라면 까라’는 문화가 남아있다.

이날 야구경기를 보려고 왕복 7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한 인원 중 대다수는 정원을 채우지 못해 팀당 할당된 수 대로 차출된 직원이었다.

오후 6시 30분에 시작되는 경기에 맞춰 퇴근 아닌 조기 퇴근을 하고 버스에 탄 이들은 밤 11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새벽 2시 반이 되야 서울에 도착한다. 물론 다음 날은 정시 퇴근이다.

누구는 “이것 또한 업무의 연장선 아니겠냐” 하지만 수십 명의 직원 가운데 누구 하나 초과근로수당을 신청하지 않는다. 그렇게 ‘업무’와 ‘선택하지 않은 저녁’ 사이에서 직원들은 저녁 없는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눈치

영어로 직역할 수 없는 기업관련 한글 단어 몇 개가 있다. 바로 ‘재벌’과 ‘눈치’다.

한동안 유행어처럼 돌았던 “저녁 있는 삶”은 누구의 삶인가 고민해본다. 과연 한국 기업문화가 직원들의 프라이버시와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고질적인 과로와 눈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바늘구멍 같은 취업 문을 뚫고 들어와 누구나 희망퇴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현실 앞에 저녁이 있는 삶은 남의 나라 얘기다.

국내 한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6년차 대리 A씨는 “조직생활에서 당연히 상사의 지시에 따라야 조직이 굴러가는 것은 맞지만, 상식 이상의 지시가 내려와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고 말했다.


#경조사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라 수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 만사를 제치고 상사의 경조사에 수발들러 가야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글로벌 IT 재벌 기업에 4년차 대리인 B씨는 작년 추석 부서 팀장의 빙모상에서 삼일장 내내 동료와 교대로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닦고 손님을 맞이했다.

그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부터 위독하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우리 모두 제발 추석은 피해갔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며 “연휴도 짧은데 추석 당일 가족들과 보내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뿐만 아니라 빙모상을 당한 그의 팀장 또한 ‘눈치 문화’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첫째 사위였던 B씨 팀장은 자신보다 회사 직급이 더 높았던 둘째 사위보다 무능해 보이지 않으려고, 또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높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려고 직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연휴를 강탈당하고 장례식장에 왔던 직원들은 감사하다는 말은커녕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B씨는 “둘째 사위의 회사 직원들은 첫째 날부터 와서 도왔는데 너희는 늦게 왔다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났지만 이해해야지 어쩌겠냐”고 하소연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간 회사에서 청년들이 마주하는 ‘가정과 개인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문화’는 결국 개인의 삶을 즐길 여유와 가정을 꾸려갈 꿈을 짓밟는다.

지난 주말 한겨례가 공개한 국내 10대 그룹 직원들의 자기 회사 평가 자료에 따르면 대다수의 대기업 직원들이 ‘일과 가정의 양립’ 수준을 보통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9월까지 1년 반 동안 소셜미디어 기업평가 웹사이트 ‘잡플래닛’(jobplanet.co.kr)에 접속한 이들이 익명으로 남긴 기록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 10곳 가운데 3-4곳 직원들의 ‘일과 가정의 양립’ 수준이 5점 만점 중 2.5점이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국내 한 대기업 4년차 사원 C씨는 “학생 때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점심시간에 나와 커피 마시며 걸어가는 회사원들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왜 그 사람들이 그 순간에 그렇게 행복해 보였는지 이젠 알겠다. 그 시간만이라도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도 빨리 결혼해 아기를 낳으라는 정부와 야근과 회식을 강요하는 기업 사이에서 직장인들은 ‘인간다운 삶’을 꿈꾸고 있다.

(코리아헤럴드 석지현 기자 monica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