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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을 잊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이야기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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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 2013-06-21 18:23
Updated : 2013-06-24 10:00

국군포로 출신 유영복 씨가 본지와의 인터뷰 도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코리아헤럴드 사진기자 이상섭)


국군포로 출신 유영복 씨 (84)는 2000년, 북한에서 50년간의 고된 노동 끝에 정부의 도움으로 서울로 귀환했다.

유씨에게 고층건물과 굶주림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으로 가득한 서울은 마치 지상낙원 같았다. 유씨는 다행스럽게 당시 94세였던 아버지가 사망하기 6개월 전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의 기쁨은 그가 남겨두고 온 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금새 희미해졌다. 그의 아이들은 “반역자”라는 멍에를 쓰고 더욱 심한 억압을 받을 것이 분명하며 그의 국군포로 동료들은 여전히 악명 높은 지하 광산에서 고통 받으며 사랑하는 이들과의 재회를 그리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씨는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수천미터 지하의 광산에서 겪었던 수치스럽고 혹독한 나날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일부는 반항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설명했다.

6ㆍ25 국군포로가족회 명예회장인 유씨는 “그곳에 아직 있는 내 동료들을 생각하면, 이 자유를 그저 즐길수만은 없다”면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국군포로들의 권리와 안전한 귀환을 옹호하는 운동가가 되기로 했다고 밝혔다.

6ㆍ25 한국 전쟁 당시 일반병사로 복무 중이던 유씨는 1953년 6월에 강원도 금화군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중국군에 포로로 사로잡혔다. 유씨가 포로로 잡힌 지 불과 한 달 후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냉전 체제가 성립된 이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민간인과 군인을 통틀어 무려 4백만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수만명의 국군포로들이 북한에 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정부는 이들 중 500여명이 아직 북한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국군포로는 80여명이며, 이들 중 29명이 사망했다.

“우리 국군포로들은 남한 정부가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우리는 정부가 영영 우리를 버려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0년, 20년, 40년동안 기다린 귀환은 모두 헛된 것들이었다”고 유씨는 회고했다.

희망의 불씨가 타오른 것은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상 최초의 남북회담을 위해 평양에 방문하면서였다.

유씨는 “당시 우리(국군포로들)은 그(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 갈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국군포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71세의 나이에 국경을 건너기로 결정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변경의 지하 광산에서 삼엄한 감시하에 노역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은 그의 아들 딸들이 “반동분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똑 같은 차별행위를 당한 것이다.

유씨의 목소리는 그의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떨려왔다. 그의 아내는 그가 북한을 떠나기 6년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는 2010년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남한으로 데려왔으나 그의 딸은 아직도 북한에서 살고 있다.

유씨는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 말할 수도 없이 차별을 당했다. 내 자식들은 대학에 가거나 노동당에 입당하거나 사회계급 내에서 올라가기 위한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국군포로 출신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으나, 이는 그들을 회유해 어려운 일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국군포로의 존재는 두 세대에 가까운 세월동안 외면당했으나 최근 몇 년간 이들의 운명은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유씨는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했으나 국군포로들의 고령을 감안하면 너무 늦었을 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수십억원을 준들 가족들을 데리고 있는 국군포로들이 여기로(남한으로) 혼자 오겠느냐”고 말했다. 유씨는 그러면서도 우리 정부가 현재 군인들과 가족들에게 그들이 포로로 잡히더라도 국가가 구해낼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누가 최전방으로 자식을 보내겠는가?”고 유씨는 지적했다.

귀환 국군포로들과 아직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들의 가족들은 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포로들의 귀환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탈북자 출신 이주원 (44)씨가 대표로 있는 6ㆍ25 국군포로가족회이다. 국군포로의 아들인 이씨 또한 북한에서 혹독한 차별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씨는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주변 아이들이 ‘꼭두각시 군대 포로의 아들’이라고 놀리면서 비웃는 것을 보고 내가 국군포로의 아들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또래들은 그에게 침을 뱉었고 그는 항상 울음을 삼켜야 했다.

이씨는 “우리 가족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었다. 나는 학교 졸업 후에 탄광에 가서 아버지가 해온 일을 이어야 했으며 입대나 고등교육, 입당 및 좋은 직업을 구하는 것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1997년 처음 중국과의 국경을 넘었으나,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수 차례 북한으로 보내졌다. 그는 2008년 9월에 또다시 용기를 내 중국으로 탈출했으며 2009년 1월에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북한에서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는 자식들에게 차별당하는 신세를 물려주기 싫어했던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의 여동생이 15살이나 많은 남성과 억지로 결혼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국군포로 아버지들은 그들의 딸들이 자신처럼 고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나이가 많던 건강상태가 어떻건 상관없이 유서 깊은 집안에 딸들을 시집보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의 여동생이 나이 많은 당원과 결혼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여동생의 남편이 그녀를 자주 구타해 결국 그녀가 가출하기에 일렀다면서 이러한 학대로 인해 정신병에 걸렸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이러한 차별로부터 벗어났으나 그의 아버지가 겪었던 고통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는 1994년, 40년간 광산에서 노동을 하다가 은퇴한 지 2개월만에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는 사망해서야 겨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면서 “그의 삶은 남한이나 미국의 어떠한 공포영화보다도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당국이 남한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말 등을 할 때마다 남한에 있는 가족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했을지 모른다면서 눈물을 훔쳤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우리는 당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면서 만약 아버지가 북측의 선전이 모두 거짓말인 줄 알았다면 더 행복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탈북자와 마찬가지로 이씨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거리는 북에 남겨진 가족들과 친척들이다. 북한 정권은 탈북자들의 가족들을 “조국을 배신한” 혐의로 처벌한다. 이씨의 83세 노모와 두 여동생들은 아직 북한에 살고 있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낫지 않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행복할 수만은 없는 처지이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기사: 송상호 기자, 번역: 윤민식 기자)

 

<관련 영문 기사>

Not Forgotten

South Korean prisoners of the Korean War suffer harsh lives in North Korea

By Song Sang-ho

After nearly 50 years of harsh labor in North Korea, Yu Young-bok, a former prisoner of war, returned to Seoul in 2000 with the help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he city looked like a utopia with posh cars, skyscrapers and life free from hunger and oppression. Yu was fortunate to reunite with his father, then 94, just six months before he died.

But the euphoria faded quickly as he began to feel guilty for those whom he had left behind. His children would face the harsher oppression that North Korea inflected on “traitors.” His fellow POWs would still be tormented at notorious underground mines waiting hopelessly to reunite with their loved ones in the South.

“No words can sufficiently describe the humiliating, grueling life we went through at those mines -- a thousand meters underground. Some were shot dead or sent to political prisons for protesting,” Yu, 84, told The Korea Herald.

“Thinking of my comrades still there, I just can’t sit back and enjoy this freedom. That is why I have become an outspoken advocate for their rights and their safe return,” said Yu, who is an honorary president of the Family Union of Korean POWs Detained in North Korea.

The former Army private was captured by the Chinese during a fierce border battle in Geumhwa, Gangwon Province, in June 1953, a month before the armistice halted the three-year Korean War on July 27 of that year.

The first major conflict during the Cold War left at least 4 million soldiers and civilians dead.

Tens of thousands of South Korean soldiers are believed to have been taken prisoner by North Korea.

Seoul estimates some 500 of them are currently alive in the North. Yu is among the 80 POWs who fled to the South. As of May, 29 of them have died.

“We, POWs, all waited for the Seoul government to come to liberate us from the pain. We believed it would not leave us there like that for good. A decade, two decades … four decades of yearning to return home were all in vain,” he said.

Hopes were revived when former President Kim Dae-jung made a landmark visit to Pyongyang in 2000 for the first inter-Korean summit, which set out a multitude of exchanges and humanitarian projects across the border.

“We anxiously hoped we would follow him, but there was no word about the resolution of our issue. Then, I decided to cross the border, even at the age of 71,” he said.

He spent most of his time in the North toiling at remote, underground mines under the watchful eye of merciless armed guards.

More painful, however, was that he had to see his son and daughter going through the same discrimination as him, labeled as “reactionary elements” by the communists.

The veteran’s voice was trembling when he recalled his families. His wife died of malnutrition six years before he left the North. In 2010, he brought his son, daughter-in-law and grandson to the South. But his daughter still lives in the North.

“My entire family suffered indescribable discrimination. Our children could not go to college, enter the Workers’ Party nor do anything to work up the social pecking order,” he said.

“Some of the family members of the POWs were given citizenship, but they were obviously intended to cajole them into joining difficult national projects.”

After two generations of ignorance, their fate has become a major government agenda in recent years. Yu welcomed the move but said it might be too late due to their old age.

“Do you think the POWs in their 80s with their families there would be willing to come here alone even if you give them tens of billions of won?”

“But it is crucial for the government to send a clear message to current soldiers and their parents that the nation would save them if taken captive. Otherwise, who would willingly send their kids to the frontline, when the Koreas remain technically at war?”

Seoul has put the humanitarian issue high on their policy agenda and sought diplomatic cooperation with Beijing to ensure the safety of the POWs who entered its territory.

But returned POWs and families of those remaining in the North demand the government should act more aggressively to account for and bring them back.

On the vanguard in the campaign is the Family Union of Korean POWs Detained in North Korea, led by North Korean defector Lee Ju-won.

A son of a South Korean POW, Lee, 44, also suffered from ruthless discrimination in the North.

“When I entered elementary school at age 7, I realized I was a son of a POW as my classmates laughed at me, calling me a son of the puppet military’s prisoner of war.” he told The Korea Herald.

His peers kept spitting on him and his shoulders were always wet, he recalled fighting back tears.

“Our family had no hope whatsoever for any better life. I was supposed to go to the coal mine upon graduation to do what my father had done and our entry to the military, higher education, party and any decent workplace was virtually blocked.”

Lee first crossed the border with China in 1997, but was caught by Chinese police and repatriated on several occasions. In September 2008, he summoned the courage again to escape to China and finally made it to Seoul with his wife and son in January 2009.

He said one of the toughest times in the North was when his sister was forcibly married to a man 15 years older than her, as his father wanted her not to bequeath the POW family backgrounds to her children.

“POW fathers did not want their daughters to repeat the arduous life as POW families. So they sent them to any men with good pedigrees or social backgrounds, no matter how old they were and regardless of whether they were healthy or not,” he said.

“My sister married an older party member who beat her and led her to leave home. She then developed some mental disorder.”

Lee is now free from persecution, but potent memories of his father’s agony still haunt him. His father died in 1994, two months after he retired from four decades of labor at a mine.

“My father regained freedom only after death,” he said. “His life was more frightful than any Korean and U.S. horror movies as he didn’t know whether he could live tomorrow under the 24/7 surveillance of the state minders.”

He also remembered his father wept when the reclusive regime kept saying South Korea was one of the world’s poorest states with highly outdated governing systems.

“My father wept in the corner of the room, saying his loved ones in the South might have died of hunger and bad living conditions as the regime’s anti-South Korea propaganda machine spoke ill of it,” he said.

“We just believed it as it was said back then. My father would have felt happy if he had known that (it was all lies).”

Like other North Korean refugees, the biggest concern for Lee is the family and relatives he left behind in the North. The regime punishes defectors’ families for “betraying the fatherland.” His 83-year-old mother and two sisters are still in the North.

“I always pray for my old mother. We have this deep sorrow that cannot be healed, and thus we can’t just be happy with what we can enjoy in this free, democratic society.”

(sshluc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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